‘태초에 말이 있었다’ 는 신약 ‘요한복음’ 의 첫머리에 있는 말이다. 이윽고,
“길은 하느님과 더불어 있고, 길은 곧 하느님이시다.”
라고 했다.
성서에서는 이와 같이 짧고 상징적인 표현이 허다하다. 따라서 해석의 여지가 많다.
성경의 연구가 아직도 학자나 종교가 사이에 계속되고 있는 것은 그 다양한 함축성 때문이다. 성경에 담긴 언어는 ‘사상의 샘’ 이라 할 것이다. 말이라는 것이 단순한 사람간의 의사소통 수단 이상으로, 신성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고대 여러 민족 간에 엿볼 수 있다. 그리스의 신화나 호메로스의 시에는 언어 자체에 일종의 자동적 능력이 있다는 의미로 ‘비양의 언어’ 란 표현이 있다. 언어 자체가 나는 힘을 가졌다는 뜻일 것이다.
인류는 언어에 의해 진보했으며, 이 언어를 존중하고 경의를 표한 흔적은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가까운 예로는 괴테의 ‘파우스트’ 속에 주인공 파우스트박사가 성경을 펼쳐 들고 철학적인 독백을 하는 대목이 있다.
“‘처음에 로고스가 이었고, 말이 있었다.’ 이미 여기서 나는 막힌다. 나는 말을 그렇게 까지 높이 평가 할 수가 없다. 어떻게 달리 번역하지 안 된다. ‘처음에 뜻이 있었다.’ 이렇게 가볍게 펜을 미끄러뜨릴 수도 없는 일,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뜻이란 말이던가. 가만있자. 이렇게 쓰면 어떨까. ‘처음에 힘이 있었도다’ 그런데 어쩐지 이것도 안심이 안 된다. 자아, 그럼 ‘하늘의 도움’,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이것이면 괜찮을 것 같다. ‘처음에 業(업)이 있었다’ 고”
파우스트 박사는 고대 사람과는 달라 말에 대해서 전적인 신뢰를 갖지 못했다.
그는 말의 세계를 샅샅이 살핀 뒤에 실천의 세계로 발을 내디뎠다. 인간은 결국 이론과 실천이란 양극의 사이에 매달려 있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서양고사성어'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 - - - -요한복음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