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의 Kumbaya

조회 수 3574 추천 수 0 2010.06.30 02:36:02

미국의 팝음악계에서 아이번 윌지그는 괴짜로 통한다. 1960년대 히트한 노래들을 '테크노'로 재생산 음반으로 내놔 이 분야에선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존 레논의 '이매진'이나 스캇 매킨지의 '샌프란스시코' 등 반전 시위가 한창일 무렵 유행했던 노래를 전자 댄스 비트로 재포장해 원곡과는 사뭇 다른 맛과 깊이를 느끼게 해준다.

윌지그는 원래 은행가로 성공한 억만장자다. 재벌급 기업인인 그가 전업가수를 선언하자 팬들이 존경의 표시로 '서 아이번(Sir Ivan)'이란 별명을 붙여줬다.

그가 부른 최고의 히트곡은 '쿰바야.' 지난 2008년 민주당 대선후보로 지명된 버락 오바마가 "우리 모두 쿰바야를 노래하며 거센 폭풍을 향해 함께 나아가자"고 지지를 호소한 이 말이 영혼의 울림이 돼 그의 가슴을 찔렀다. 쿰바야의 멜로디를 테크노로 처리하고 가사는 오바마를 지지하는 내용으로 살짝 바꿔 유튜브에 띄운 것.

피부색깔에 관계없이 젊은이들 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끈 이 노래는 오바마를 일약 수퍼스타로 만들었다. 그의 대통령 당선은 '쿰바야'가 적지 않은 기여를 한 셈이다.

흑인 영가 '쿰바야'는 '내게 임하소서(come by here)'란 뜻이다. 백인들이 불렀던 찬송을 노예들이 '쿰바야'로 잘못 알아들었다는 것이다. 억압과 착취의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불렀던 노래가 나중엔 세계인의 애창곡이 됐다.

조앤 바에즈가 통기타를 뜯으며 부른 '쿰바야'는 반전.민권운동의 상징어가 되다시피 했다. 지금도 한여름 밤 모닥불을 피워놓고 손에 손을 맞잡고 부르는 캠프송이다. "쿰바야 나의 주님 누군가가 울부짖고 있어요 쿰바야."

오바마 때문인지 요즘은 정치용어로도 흔히 쓰인다. 이른바 '쿰바야 순간(Kumbaya moment)'이다. 현실은 어렵지만 희망을 가지면 언젠가 꿈은 반드시 이뤄진다는 의미다.

오바마가 전당대회에서 후보로 지명된 날 힐러리 클린턴은 그동안의 앙금을 말끔히 털어냈다. 그의 손을 높이 치켜 들며 축하해주자 언론은 이를 '쿰바야 모멘트'라 불렀다. 흑인으로선 처음으로 백악관 주인이 된 오바마. 전혀 불가능해 보였던 그의 꿈이 마침내 이뤄진 것이다.

가끔 오바마는 '쿰바야 모멘트'를 자신이 직접 만들어 내기도 한다. 며칠 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오바마는 백악관이 아닌 자신의 단골 대중식당에서 오찬을 함께 하는 파격을 연출해 냈다. 와이셔츠 차림으로 햄버거를 함께 먹으며 우의를 다진 것. 다음날 신문은 '쿰바야 모멘트'란 제목으로 러시아와 진정한 화해를 갈망했던 오바마의 꿈이 현실이 됐다고 논평했다.

뭐니뭐니 해도 '쿰바야 모멘트'는 이번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대회에서 드라마틱하게 펼쳐졌다.

우루과이와의 16강전이 열리던 날 거리응원을 펼친 백만명의 서울시민들은 '쿰바야 모멘트'의 진수를 선보였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 같다. 비가 내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8강진출의 염원을 외친 수많은 인파. 월드컵 80년 역사에 이같은 장엄한 장면이 있었을까 하는 숙연한 생각까지 들게 된다.

국가 대항전인 월드컵이 '징고이즘(맹목적인 애국주의)'을 부추긴다는 비아냥도 나오기는 하지만 월드컵의 진정한 목표는 꿈과 희망이다. 4년 후 브라질 월드컵에서도 '쿰바야 모멘트'는 여전히 유효하다.

일상의 생활에서도 '쿰바야'를 한번 불러보자. "내게도 임하소서 나의 꿈." 고단한 삶일 망정 위로를 받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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