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는 동서가 사막이고, 북방은 바다에 둘러싸여 있는 나일강 유역의 좁고 기다란 지역이며, 나일강이 여름철에 넘칠 때 상류에서 쓸려 내려온 비옥한 진흙들이 비료 없이도 풍요한 농사를 거두게 했다.
이러한 혜택 받은 자연적인 여건 덕분에 기원전 3000년경에 이미 통일 국가를 이룩했으며, 왕권이 확립되어 있었다. 고대 이집트는 대략 삼천의 왕조가 교대하였는데, 古王國, 中王國, 新王國 이렇게 셋으로 구분하는 것이 보통이다.
고대 이집트의 유적으로 가장 상징적인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이 피라미드일 것이다. 이것은 주로 나일 델타 지대에 있던 고대 국왕의 능묘인데, 그 방대한 규모는 왕권의 강대함을 시사하고 있다. 모양은 저변이 네모반듯하며,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며 사면을 이룬다. 중앙에 왕의 미라를 안치하는 방이 있고, 그 방의 가까운 사면 벽을 뚫고 깊은 창문이 하나 있는데, 보름달이 뜨는 밤에 달빛이 일직선으로 들어와서 미라의 얼굴을 비추게 되어 있다. 이집트의 측량술은 그처럼 정확했던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피라미드는 대략 4,000여개이다. 그 중 최대의 것은 기제에 있는 3기인데, 높이가 146미터, 저변길이가 244미터나 된다. 이 피라미드에 있는 미라의 주인공은 이집트의 제4왕조 쿠푸왕과 그 아들 카프레, 손자 멘카우레라고 하는데, 그리스 史家 헤로도토스는 그 피라미드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흥미 있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쿠푸왕은 모든 신전의 문을 닫고 이집트 사람들의 예배를 금했고, 사람들을 모두 피라미드 건설에 강제 동원했다. 아라비아 산중에 있는 채석장에서 돌을 캐다 나일강까지 운반하는 사람, 강을 건너온 돌을 받아서 류비이 산까지 운반하는 사람 등 이 노역에는 십만 명의 장정이 석 달 걸려 교대로 투입되었다. 돌을 운반하여 도로를 만드는 데만도 10년이란 세월을 소비했다. 피라미드 건설 자체는 20년이 걸렸다고 한다. 즉, 십만 명의 이집트 사람들이 30년간 계속 강제 노동에 종사했다는 셈이 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쿠푸왕의 피라미드였다.
왕도 나중에는 자금이 딸려 그의 딸을 창녀로 팔았다고 하는데, 사실여부는 확실치 않다. 이집트 사람들은 이 피라미드 때문에 고생한 것은 틀림없는 일이며, 쿠푸왕과 그 아들 카프레가 치세한 150년간은 모든 신전이 폐쇄되었으니, 이들 두 왕이 인심을 잃은 것은 확실한 일이다. 그리고 피라미드의 어원에 대해서는 이집트어의 ‘피레므스(높이)’에서 왔다는 것이 유력한 설이다.
'서양고사성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