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보다 더 좋은

조회 수 3226 추천 수 0 2010.07.07 00:45:06
지난 5월 LA에 왔던 한비야씨는 자신을 키운 건 8할이 산이라고 말한다. 산을 좋아하던 아버지가 아장아장 걸음마를 할 때부터 산에 데리고 다녔고 그렇게 물려받은 '산쟁이 유전자' 덕분에 산은 평생을 같이할 친구가 됐고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는 취미가 됐으며 삶의 소중한 지혜를 가르쳐주는 스승이 됐다고 한다.

시간만 나면 산에 갔고 월드비전 긴급구호팀장으로 해외출장에서 돌아오면 짐만 집에 던져놓고 산으로 달려갔단다. 산밑까지 오가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북한산 자락으로 이사까지 했으니 애인도 그런 애인이 없는 셈이다.

아니 애인이 아니라 밥이라고 했다. 같이 산에 가기로 한 사람들이 아침에 비가 오면 전화로 "비 오는데도 산에 가요?"라고 묻곤 하는데 그녀의 대답이 인상적이다. "어머 비 온다고 밥 안 먹나요?"

산에서 그녀가 느끼고 배운 것을 몇마디 말로 옮기기는 불가능하리라. 자존감을 선물로 받았고 오르막 뿐 아니라 내리막도 똑같이 재미있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됐고 예전에는 잘 못 걷는 사람들에게 자기 보조에 맞추라고 채근했지만 어느새 자신이 그들에게 맞추게 됐다는 얘기를 들으며 그저 그 깨달음을 짐작해보려 할 뿐이다.

하기야 땀흘리지 않고 몸이 아니라 귀와 머리로 배운 것들 중 진정 나에게 피와 살이 된 것이 얼마나 있던가.

매 주말이면 산에 가는 친구가 있다. 친구는 다음날이면 꼭 산행기를 메일로 보내온다. 그 친구에게 물은 적이 있다. 왜 그렇게 힘들여 산에 오르느냐고. 아무런 목적이 없단다. 산행은 산을 오르는 순간순간의 과정 왜 오를까 생각조차 잊어버리게 하는 과정이고 산을 오르며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다 받아들이다가도 한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가 없어지는 나약하고 어리석은 마음을 보곤 한다고 한다.

그리고 며칠 전 최경자씨를 만났다. 올해 여든살의 최씨는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2650마일 중 1650마일을 걸었고 이번에 1006마일 구간을 마저 걸어 미 서부대륙 종주에 마침표를 찍을 계획이다.

최씨는 그랬다. 키작고 늙었고 남들 스무걸음 걸을 때 자신은 열걸음 밖에 못걷지만 묵묵히 산길을 걸으며 인생을 배웠다고. 오만가지 별의별 생각이든 감정이든 소유욕이든 불필요한 것들은 다 버리고 자기와 자연이 오롯이 하나가 되는 순간의 행복감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느냐고. 그리고 덧붙였다. 누구든 211마일 존 뮤어 트레일을 종주했다면 그게 무엇이 됐든 세상일도 잘 해낼 수 있을거라고.

눈으로 본 그 세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나이에 관계없이 모두들 '막강 동안'이다. 그들이 짓는 웃음은 소년소녀의 그것만큼이나 해맑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다들 튼튼하다는 것이다. 한비야씨는 산에 다니던 힘으로 7년을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을 돌았고 최경자씨는 1년 만에 대장암 수술흔적까지 없앴다.

산을 오를 때 다 같은 속도로 오를 수는 없다. 느리면 느린대로 빠르면 빠른대로 자기 자신에 맞는 속도로 올라야 한다. 그래야 오래 갈 수 있고 그래야 재미있게 산행을 할 수 있다. 우리네 인생길도 그런게 아닐까.

평탄한 길 오르막길 내리막길 꼬부랑길 갈림길…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쉼없이 같은 길에 올라선 다른 이와 만나고 헤어지며 누구의 시처럼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내려갈 때 보면서 그렇게 걸어가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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